작성자 조다윗 선교사
작성일 2009-03-05 01:4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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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포스트모던시대와 통합적 매개 문명 이슬람Ⅰ

세계의 매개를 통한 변주와 통합, 이슬람

이슬람 문명이야 말로 통합적 매개문명으로서 가장 변주적 통합에 능수능란한 면모를 지닌 문명이었습니다. 이슬람은 동양과 서양의 가교적 위치에서 발생했습니다. 중앙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소아시아 유럽을 잊는 중동권에서 이슬람교의 발흥은 모든 문명의 양분을 교접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크(Silk)가 중앙아시아 이슬람의 대표적 교역 상품이었음을 대부분 잘 아실 겁니다. 실크는 씨줄과 날줄을 엮어 직조(Mixture)와 교직을 통해 생산되어 동양서 서양으로 이슬람을 통해 매개 수출 되었습니다. 이슬람의 동서양을 매개하던 대표적 상징물인 실크가 직조와 교직된 상품이었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직조의 영문 단어인 Mixture는 대개 화합물이 서로 형질이 변화되어 혼합되는 과정을 나타내는 단어인데 예외롭게도 얇은 실이 자신의 성분을 잃지 않고 인장 강도 높인 실크의 직조 과정에서 쓰이고 있다는 점에서 이슬람의 매개 문명적 성향을 잘 상징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슬람은 마치 세계 문명들을 씨줄과 날줄로 삼아 통합했지만 각 세계의 고유성분들과 자신의 성분을 화학물처럼 융합해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이슬람 알라 신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교직물처럼 삼아 통합하였습니다.

이슬람이 통합적 매개 문명, 혹은 중계 문명이라는 것은 라는 서구 전통적 오리엔탈리스트 학자, 버나드 루이스도 언급한 바입니다. 예컨대 원산지가 아프리카 에디오피아인 커피는 밤새 잠을 자지 않고 말똥말똥 깨어 있는 양과 염소를 기이히 여겨 그들이 먹는 붉은 열매를 수상쩍이 살핀 목동에 의해 발견되어 이슬람을 통해 유럽으로 수출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슬람은 당시 ‘까베’라 불리 우는 오늘날의 커피의 수출을 그냥 유럽으로 중계, 전달한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계율을 일획일점이라도 지켜야 하는 거룩한 알라 신 앞에 음주 문화를 없애는 대안 문화로서 카피하우스라는 독특한 주점 대체물을 고안하여 매개, 전달했습니다. 물론 소아시아 터키에서 검정물을 일정한 장소에서 밤을 지새며 마시는 투르크인들은 영국인들에게는 상당한 문화 충격이었을 테지만 투르크 제국에 대한 압박과 동경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유럽인들은 오래지 않아 커피하우스에서 경멸하던 검정물을 홀짝이며 잠을 깨우며 토론하는 것을 꽤 고상한 일로 받아드렸습니다.

또한 아랍인들은 그들이 유럽으로 수출한 커피하우스에서 인도의 게임들을 가져다가 즐겼습니다. 이른바 오늘날 우리가 서양인들에게서 들여 배운 듯 아는 체스와 주사위 게임은 사실 인도인이 고안한 것인데 아랍인들이 받아드려 유럽 등지로 전파하는 등 세계화 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무슬림들은 이 게임을 그냥 세계로 흘려 보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절대 유일신인 알라신에 대한 신학적 명제를 구체화 하는 것으로 게임의 내재적 의미를 철학했습니다. 주사위처럼 세계에 던져진 인간에게는 신의 주권과 그에 따른 인간 운명만이 존재한다는 운명론적 관념과, 대비되어 인간에게는 체스의 말판처럼 각자 고유의 선택할 수 의지가 존재한다는 자유의지와 선택의 관념을 게임을 통해 상징적으로 철학, 현학했던 것이었습니다.


히브리 유일신 관념 차용의 이슬람과 헬라 지식 신의 야합

이슬람의 유일신 관념은 무함마드가 상인 시절 조우한 유대인들을 통해 구약을 접하면서 정립되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들은 헤지라를 통해 예루살렘의 성지 예배 방향을 곧 메카 쪽 방향으로 옮겨 예배하였습니다. 그들은 신구약을 받아드리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던 사실을 자신들의 조상 이스마엘을 바치는 장면으로 바꾸어 편집하였고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부활한 사실을 그의 제자가 대신 못박히고 예수는 숨어서 목숨을 보존한 것으로 재편집하면서 기독교적 정체성이 있는 성경을 자신들의 알라신을 설명하기 위한 내러터브, 이야기로 변주해 가졌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러티브의 기본 조건인 통일성과 일관성에 있어서 재편집은 치명적인 독이 었습니다. 아랍과 알라신의 정체를 강화하고 유대와 예수그리스도의 정체를 약화 시키는데 재편집은 효과적인 방법이었지만 성경의 밀도 높은 내적 일관성과 통일성은 훼손되어 알라신의 경전에 대한 신빙성이 떨어질 위기가 존재했습니다. 이슬람이 이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택한 수단은 간단했습니다. 또 다른 거대 문명인 헬라의 지적 체계를 수혈하는 것이 그 보완책이었습니다.

당시 그리스 로마, 헬라의 지식 신은 유럽 본토에서는 영향력을 급격히 상쇄시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단순한 복음의 명료성과 급격한 전파 앞에 웬만한 이성적, 지적 체계화 앞에서도 교만한 토론으로 현학하던 유럽 본토는 유래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단순 명쾌한 복음 앞에 경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헬라적 제자들은 스승들의 기득권을 유지시켜주기 위한 이용 관계를 위한 지적 체계화에 지쳐 있었습니다. 스승과 제자는 본질적으로 서로 인격적 관계여서, 지식정보 인프라 때문에 기득권이 보장되기 때문에 서로의 지적 자산을 보존하고 학문적 입지를 물려주는 이용 관계가 정상적 인격 관계로 작동하기 어려웠습니다. 학문적 입지나 이용가치가 되지 않으면 스승은 제자를 버렸습니다. 제자는 학문적 야망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스승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헬라적 제자들은 더 이상 그들 이용관계의 스승이 주장하는 인간적이고 지적 체계화 된 신에게 정상적 신격성을 부여하기에 의문이 생겼습니다. 사랑이라는 관념에 에로스의 신이라든지, 쾌락이라는 관념에 바카스라는 신이라든지 철학적 지적 체계와 대응되는 신의 관념은 인간 머리 속에 존재하는 지식이지, 살아있는 신격성으로 받아드려지기 어려웠습니다. 이런 와중에 전파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비록 보잘 것 없는 무지렁이 사람들이었을지언정 인격성을 위한 사랑과 희생의 가치를 온몸으로 지키는 기독교 공동체를 통해 점점 유럽 사회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성령의 강력한 표적이 따랐습니다. 그들이 선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따르는, 병든 자들을 고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며 귀신을 떠나가게 하는, 강력한 초자연적 표적은 살아 있는 신격성에 대한 강력한 반증이요 신을 지적 관념화 가두었던 헬라인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야 말로 헬라의 지적 체계화의 신들은 목수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본토에서 점점 입지를 잃고 낮은 포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당시 유대 히브리 유일신 관념을 차용 변주했던 이슬람은 신과 경전에 대한 내적 통일성의 부재로 인해 강력히 신에 대한 변증과 그에 따른 지적 체계화를 필요케 되었습니다.이러한 필요충분조건으로 로마 이남으로 쫒겨 나고 있던 헬라의 지식 신과 그 지적 인프라는 야합할 아랍 세력, 이제 막 정체를 갖추던 알라신을 만났습니다.

헬라 지적 체계는 복음의 강력 앞에 도피처를 찾고 있었고 이탈리아 남부로 내려와 소아시아를 거쳐 아랍으로 들어가게된 것이었습니다. 바로 복음적 유럽의 헬라적 반동인 르네상스가 일어나기 위해 소아시아 아랍에 세워진 도서관을 통해 보존 되었던 그리스 희비극,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등 헬라 철학의 자료들이 헬라 지적체계의 유럽 복원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교회사나 선교 역사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지만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렇게 이슬람권 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던 헬라적 지적 자료들은 신에 대한 매개 변증이 필요했던 이슬람 신학에 결정적 자양분으로 사용되어 결합되었습니다. 즉 이미 유대-기독 유일신 경전을 차용하였지만 아랍적 민족 가치와 알라 신에 따른 가치로 재편집된 경전과 신관에 통일성을 부여하길 원했던 이슬람 학자들은 자연스럽게 헬라적 논리 변증을 받아드려 이슬람 유일신에 내적 일관성과 논리적 체계화를 통해 로직적 생동력을 불어 넣으려했습니다. 이슬람 신학은 이러한 배경하에 히브리-기독교적 유일신 관념을 차용 변주하여 헬라적 지적 체계화를 통해 신학적 기틀을 마련하는 것으로 알라신을 옹호하는 방면으로 직조(mixture)되어 졌습니다.
강력한 유일신 관념과 헬라 지식 체계화를 통한 신학적 변증을 갖춘 이슬람의 알라는 주변 어떤 창조된 신들보다도 강력해 그들의 영토와 지배 관계를 병합 했습니다. 세계 역사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 히브리 문명과 헬라 두 문명의 자양분을 차용, 토착적 종교성과 통합된 신을 작동시켰습니다.


기독교의 헬라적 지식 체계화

충격적이게도 기독교의 지적 체계화는 이슬람의 신학적 체계화의 영향이요, 후발 작용이었습니다. 초대 기독교는 지적 체계화와는 거리가 먼 종교였습니다. 그들에게 전해진 바울의 편지는 서신의 형태로 복음에 대한 모든 민족을 향한 전파와 그 내용을 담은  일상적이면서도 영적인 글이었지 분류와 분석을 통한 지적 체계화의 헬라적 전통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글은 헬라의 현학적이고 철학적인 글들보다 도리어 논리의 명백함과 일관성을 지닌 이해하기 쉬운 편지 형태의 것이었습니다. 사실 초대 교인들은 지적 인프라라고 할만한 경전 소스도 제대로 갖추고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가끔 사도들의 서신의 일부를 돌려볼 뿐 주후 4세기까지도 신약 성경은 확정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단순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과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에 따라 순종하고 행전함으로서 헬라적 지적 체계를 숭배하고 있던 당시의 유럽을  복음화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슬람과 조우한 후 기독교는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 당하고 매우 큰 불안감에 휩싸였습니다. 로마 교황청을 중심으로한 당시 교회는 이미 제국적 조직화를 교회 조직 내에 답습하고 있었고  기관화되어 초대 교회의 순수성과 성령의 능력을 거의 퇴색시키고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로마교회는 그들의 자존심과 기독 신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당시에 침범해온 무슬림들의  신학적 변증에 답변을 할 수 없었던 수치심을 새긴 채 본인들의 논리를 점검했습니다.
무슬림이 기독교 인들을 난처하게 빠트렸던 변증적 질문들, 예컨대 어떻게 처녀가 잉태할 수 있는가, 절대 주권 신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올 수 있는가, 어떻게 예수가 신이라면 인간처럼 죽고, 부활할 수 있는가 등의 질문들에 대한 답변, 즉 변증적 증명을 요구하였을 때 믿음은 단지 헬라적 인간 철학으로 증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증인(witness)을 통해 증거될 뿐이라는 예수님의 방법을 따랐다면 성령이 직접 증인들과 함께 예수님을 증거하셔서 초대 교회와 바울처럼 죽은 자가 일어나고, 병든 자가 나으며, 귀신이 떠나가는 등에 성령의 직접적 역사로 이슬람 역시 복음화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 교회는 조직화되고 기관화되어 복음을 증언하는 성령의 능력보다 로마 제국적 조직과 경제, 사회 권력을 더 믿고 있었고 따라서 너무 쉽게 이슬람의 신학적 변증과 지체 체계화에 대한 상처와 동경으로 기독교 신앙을 헬라적 지적, 신학적 체계로 재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헬라적 지적 체계를 역수입함으로서 초대 교회적 복음의 역동성과 성령의 능력을 통한 무슬림 복음화에 대한 단초를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매우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역동성과 전파력이 신학적 체계화 이후 점차 둔화되어 선교의 세기인 18세기 이전까지는 유럽에서 변경에서만 복음이 머물렸다는 점에서 이슬람에 내제된 헬라 지적 체계화의 영향에 따른 기독교 신학의 체계화가 어떠한 득과 실이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만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중세 기독교 이후의 신학적 체계화의 산물인 주권과 자유의지와의 관계가 이미 수 세기 전에 이슬람의 신학적 체계화 내에 주사위, 체스 같은 상징적 유희로까지 철학 현학 되었다는 것은 신학적 체계를 주장하는 크리스천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던져줄만합니다.

이슬람은 신들로부터 조종 통제된 문명들의 자양분들을 중계적 위치의 이점을 가지고 알라의 신에 대한 인간의 경외와 복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받아드렸습니다. 이슬람의 알라 신이 복음에 대해 아직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강력이 있었다면 사람들을 통제 조종할 수 있는 문명 시스템들의 힘을 검증하여 통합했다는데서 그 연유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슬람은 문명들의 공간적인 인카운터, 조우를 통해 동시대의 몇몇 문명의 영향력을 변주 통합했을 뿐입니다. 시대를 걸쳐 형성된 여러 모든 문명들의 영향력을 검증하고 받아드리기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슬람 정체성이 형성되고 나서는 이슬람은 수용력과 유동성이 강한 종교가 전혀 아니었고 형성된 정체성을 고수하고 관철시키는 종교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공간에 제한이 있는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만든 종교가 시공간의 모든 문명과 조우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기도 합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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