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조다윗 선교사
작성일 2009-04-16 06:14:21
이메일 hiskingdom@empal.com
제목 포스트모던시대와 통합적 매개 문명 이슬람Ⅱ

포스트 모던적 시간 (Time),
지식(Memory) 압축

포스트 모던(Post Mordern)이라는 현시대성은 놀랄만한 축적과 통합을 보여주는 시기입니다.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코드 중 하나가 바로 모든 시대성과 공간성을 선택적으로 변주, 통합한다는 것에 대해 학자들의 이견이 별로 없습니다.
현시대성은 ‘사람들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증가하리라’는 다니엘서의 예언대로 시간과 공간을 압축, 지배하려 시도하고 있습니다. 시간은 인간에게 통제 불가능의 영역이어서 인간은 시간을 기억이라는 과거로써만 취급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다만 일어나고 있는 현재 시간 혹은 일어날 미래 시간을 제외하고 과거 시간 즉 기억, 메모리를 정보로서만 취급한다면 인간은 마치 시간을 통제하고 지배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현재와 미래는 인간에게 언제나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는 잠재적 불안 요소이고, 불확정성이 증가되는 현대 사회는 현재와 미래적, 메모리를 정보화하여 인과론적으로 예측, 분석, 대처함으로서 불확실성의 미래를 약간이나마 통제 가능한 영역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도리어 인생들의 한계에 대한 처절한 몸부림과 불가항력을 느끼게 합니다.
인간은 머리카락의 굵기의 1/4000 회로선을 개발해 작은 칩에 수백 기가바이트(GB)의 정보를 축적하게 되었고, 이 같은 정보 축적 기술력은 수 개월에 한 번씩 갱신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칩 하나로도 인류의 모든 지식을 수 천 번 압축하고도 남을만한 데이터를 구축할 수 있다는 의미이고, 인간의 후천적 지식 축적이 기계적 정보 축적에 훨씬 못 미치는 가치를 지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에 따라 인간들은 테크놀로지 발달에 따른 시간의 기억, 정보 압축을 통해 미래를 어느 정도 예측, 대처, 통제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는커녕, 도리어 지식 압축에 따라 인간 스스로가 지식 정보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한편 공간적으로 세계는 경제적 단일 시스템, 이른 바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이름의 세계체제로 급속히 통합, 동조화하고 있습니다. 바벨탑 사건 이후 인류는 한 번도 대륙간 제국 이상에 동조적 단위로 통합된 적이 없었으며, 전 세계가 단일 단위가 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현재 추진되고 있는 세계화 가치에는 놀랍게도 세계 단일 시장권의 등장에 따른 세계 통합의 의도와 세계 무한 자유 경쟁에 따른 세계적 경제 능력의 제고를 통한 물질 번영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세계화를 통한 공간적 통합을 추진하는 경제인들과 정치권력자들은 단일체제로 동조화하고 있는 세계 시장에서 누구나 기회를 가지고 자유롭게 세계 경쟁에 참여하여 세계의 경제적 효용 능력을 극대화하면 세계의 경제가 번영할 것을 자신해왔습니다. 따라서 세계 통합 단위의 자유로운 시장 진입과 경쟁을 막는 국가 간 장벽은 모두 철수해야 하는 것이 세계화 시장 논리의 기본 저변입니다.
(세계화의 세계 시장 개방은 국내에서 작년 WTO, 우루과이라운드 등을 통해 소시장 개방을 앞두고 미국산 광우병 논란이라는 홍역을 통해 경험한 바 있고 10년 전 IMF 구제금융과 세계 시장 참여와 재기를 위한 구조조정의 뼈아픈 국가 경제 파산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학습되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추세가 비단 국내적 특수상황만이 아니라 미국발 경제 위기를 통해 국가 단위의 경제 위기가 세계 시장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가를 경험하며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얼마나 보편적으로 동조화 되었는지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 시장에 진입한 개체나 기업, 국가는 능력의 극대화를 통해 시장에서 워크 아웃되지 않고 살아남아야 합니다. 개체 경쟁력은 곧 소속 기업 경쟁력으로 편입되며 국가간 경쟁에서 기업은 소속 국가 경쟁력으로 편입됩니다. 따라서 러시아, 중국, 일본, 유럽, 미국 등 국가 간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국가는 기업, 국민 개체의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유도해야 합니다.
또한 기업은 세계 경쟁 논리에 뛰어들 때 세계적 시장에서 자본재나 기술력은 각 기업끼리 우열을 따질 수 없을 만큼 평준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즉, 다국적 기업끼리의 경쟁을 염두에 둘 때 삼성과 모토로라, 노키아 등은 세계 핸드폰 시장의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서로 가격 경쟁하지만 기술력의 우열과 자본재의 우열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 수준이 비슷해지고 평준화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노동력의 제고를 통해서 경쟁력을 확보하려 하게 됩니다. 즉 생산품의 가격 당 이윤을 높이기 위해서, 즉 가격 경쟁에서 경쟁 기업보다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기업은 되도록 적은 대가를 지불하고 필요한 노동력을 가지려 몸부림치게 됩니다.
예컨대 핸드폰의 제작 판매를 위해 필요한 다양한 노동력-언어적 지식 정보를 습득한 무역 영어 통역가, 반도체 기술 확보를 위한 IT 지식 정보 전문가, 대량 무역을 위한 바이어, 하청업체 관리자 등-을 뽑을 때 이제는 이전과 같이 여러 사람을 고용하지 않습니다. 세계화된 경쟁체재 아래서는 여러 사람에게 지불해야할 임금비용을 최대한 절약하여 두 가지 이상의 멀티 지식 정보를 축적한 사람을 뽑아 한 두 사람만을 고용합니다. 이렇게 고용을 줄이고 효율적 노동 운영을 한 기업만 경쟁사보다 적은 자본을 투여하고 이윤을 남겨 가격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합니다. 반대로 가격 경쟁에서 노동력의 효율성을 제고, 이른바 구조조정을 하지 못한 기업은 가격 경쟁에서 도태 되어 시장에서 자리를 내어주고 파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사원들도 지식 정보 축적에서 예전에 두 세 사람이상의 몫을 가지고 회사에 기여하지 못한다면 상시적 퇴출, 실업의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현재의 국제적 대량 실업 사태는 세계화의 결과입니다. 세계적 경쟁 시장 속에서 인생들은 다만 지식축적의 기계 수준으로 전락하여 고용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평생토록 지식 갱신을 하지만, 비정규적 고용, 워크아웃과 구조조정의 바람 등 고용불안의 세계적 연쇄 앞에 끊임없이 고통당하게 됩니다.
이미 이런 세계화의 현상은 더 이상 제동을 걸 수 없는 가속력이 되었습니다. 세계 체제적 병합은 아담의 후손이 유도한 현상임에도 더 이상 개체도, 기업도, 민족도, 국가도, 어떤 국제사회 구성 단위도 제어할 수 없는, 폭주하며 달리는 기관차처럼 되었습니다. 국제 사회는 이미 세계화의 현상이 구조적인 세계 불평등, 탐욕적 경제 권력에 따른 국가 파산과 구제 금융(IMF) 차관, 투기적 자본의 국가간 이동을 통해 경제적 불안정성과 유동성이 증가되는 등의 심각한 부작용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여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제 사회의 어떤 권력도 무한 경쟁을 통한 세계적 시장 통합에 제동을 걸 수 없습니다. 예컨대 만약 이 세계화 시스템을 인류 사회의 위협으로 느껴 국제 사회의 가장 강력한 국가 권력인 미국이 세계 시장 경쟁을 중단한다 하여도, 경쟁을 중단한 미국의 부가 세계 경쟁 시장의 일부로 기능하고 있는 주변 강대국에게로 흡수되기 때문에 결코 초강대국 미국이라 할지라도 세계화된 시장을 통한 경쟁에 제동을 걸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국제사회 일원 모두가 일시에 세계 시장 경쟁을 중단케 하거나, 세계화의 부작용을 완화해 갈 초국적 권력 집단이나 의사 결정 기관도 현 국제 사회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놀랍게도 이미 자유주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대체적 통치라는 용어를 통해 국제 사회에 세계화 현상을 보완, 견제할 만한 초국적이고 세계적인 경제, 정치, 군사 권력을 종합한 통치형태(Governance)에 대해 논의되고 있습니다.)

인생들이 미래의 불안정성을 극복하고자 세계화를 통해 공간을 하나의 단위로 통합하고 시간을 축적, 지식화하여 지배하려 했던 시도가 도리어 인류공동체를 큰 진통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화의 공간 통합과 과거의 지식정보를 통제하여 미래를 통제 가능한 영역으로 만들려는 인류 공동체의 시도는 지극히 반성경적 모사(謀事)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의 언급대로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시간적 압축과 통제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밖에 할 수 없는 신만의 고유 영역입니다. 공간과 시간의 지배, 즉 세계와 미래, 비전의 통제력은 오직 주께만 있다는 것을 인생들은 겸허히 인정해야 합니다.

지식무당, 미래학자

고대 코드에서는 자연 재해와 전쟁 등 통제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틈타 영적 무당들이 활개 쳤습니다. 영적 코드에 접속이 능한 샤먼은 타락한 천사, 가장한 신들로부터 과거의 정보를 수집하고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세상을 두루 다니는 영적인 존재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물리적 세계를 관찰한 내용을 전달했기 때문에 그들의 과거 정보는 정황을 그리고 사람들을 믿게끔 만드는데 능수능란 했습니다. 그리고 감히 누구도 손댈 수 없는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지꺼렸습니다. 과거 정황에 대한 묘사로 사람들을 홀리고 신용을 얻었기에 미래에 관한 접근 능력이 샤먼에게 전혀 있을 수 없었지만 미래를 말함으로서 그들의 영적 파워만이 아니라 사회적 권력도 얻어 나갔습니다. 예를 들면 어느 집안의 과거의 우환의 정황을 얘기한 샤먼은 그와 같은 사건이 있었던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신뢰를 확보한 뒤, 장래에는 더 큰 재앙이 있을지 모르니 신에게 의뢰하여 보호를 받으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 신과 소통을 독점하는 이는 무당 자신이었고 매개자인 무당의 이야기를 전폭적으로 지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은 종종 저주의 두려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조장해 자신을 따르게 했습니다.
그들은 우선 영적인 파워를 사람들에게 보여야만 신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영적인 파워는 진짜 영적 세계와 교접하고 있다는 정황을 사람들에게 확신시켜야 합니다. 따라서 보편적 사람 이상의 영적인 압도, 신을 부르고 북치고 피리 불고하는 따위의 전사(前事)를 통해 영적인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는 듯한 과도한 모양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합리성 위에 기반하여 증명되지 않은 것들을 모두 퇴출시켜버린 근대 이후에는 더 이상 영적인 진입 채널, 신을 부르고 북치고 피리불고 하는 따위의 과시를 통해서는 더 이상 권위나 권력은커녕 정상적인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존립 자체도 위협받고 공격당하는 일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근대 이후 미래를 점치는 자들은 더 이상 영적 진입 채널을 통해서가 아니라 과거의 정보를 장악하여 설득력 있게 미래를 제시하는 논리적 인과율로부터 인생들의 신뢰를 확보해야만 했습니다. 다시 말해 영적인 세계에 대한 출입을 보여주는 따위의 일을 해서는 도리어 장악한 과거에 대한 정보력까지 신빙성을 의심받게 되니, 자연스럽게 빙의와 같은 영적 진입은 출입을 차단하고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과거에 대한 정보가 신빙성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는 전사(前史)는 취득한 지식에 대한 합리성을 증명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과거에 대한 분석의 신뢰성을 통해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미래 예측에 대한 지식 정보마저도 쉽게 믿어 버린다는 것을 근대 지식 무당은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부류의 근대 합리성을 기반으로 한 과거 정보 분석을 통한 미래 예측가, 이른바 미래학자라고 말하는 다양한 부류의 군들을 다만 지식 무당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워렌 버핏, 앨빈 토플러, 피터 드러커 등의 부류가 단기적 지식 정보의 분석으로 주로 경제적 권한, 그래봐야 지식 정보를 선점, 매매하거나 투기 경영을 통한 탐욕적 부의 창출 따위의 예측을 하는 정도로 사람들의 각광을 받고 있지만 저는 이러한 자들을 학자, 아카데믹 스퀄라군 보다는 근대 지식 무당, 샤먼군 정도로 분류하고 싶습니다. 세계의 불확정성에 대한 안정적 미래를 담보로 인류사회에 이들의 이름들은 꽤 유명해지고 이들의 견해는 믿어 봄직한 이론처럼 되어가고 있지만 결국 이들의 운명과 견해는 메뚜기도 한철이라는 속담에 걸 맞는, 연약하고 한계가 분명한 인간으로부터 나은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엊그제 워렌 버핏의 기업이 부도 직전에 몰렸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그는 안정된 미래를 위한 무수한 예측과 안정적 투자 이론을 사람들에게 팔아 놓고도 자기 기업이 파산 직전에 몰릴 것은 예측하지 못했나 봅니다.)
진지하고 탐구적인 학자군에서는 감히 미래학이니, 미래 예측이니 하는 따위의 수사를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학문적 지식 정보나 연구 성과가 미래를 지배, 경영할 능력이 없음을 세계를 진지하게 연구하는 학자라면 금방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진지한 학자들은 자신들의 논의가 일어난 과거와 현실 범위 내에 현상을 치밀히 관찰, 분석하고 약간의 해석과 인류공동체를 위한 적용점을 찾을 뿐입니다. 양심적 학자들은 학문적 연구 범위에서 벗어난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대해 큰 불안감에 직면한 현대인을 자극하여 선정적 동조를 얻을 뿐이지 정말 일어날 미래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학자들은 단기적인 인과율에 따른 예측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지만 단 5년을, 아니 6개월을 명확하게 예측한 전례조차 거의 없습니다.
미래와 비전은 절대로 사람이나 천사나 그 어떤 피조물에게 속할 수 없습니다. 미래와 비전은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사람들은 미래와 비전을 자신의 유익으로 구하나, 하나님의 비전과 미래는 다른 모든 전망을 폐하고 오직 인류 구원의 역사에 관한 관심입니다. 불안감이 가중되는 현재의 불안정성이 엄연히 존재하겠지만 믿음의 성도들은 다른 편법을 붙잡지 말고 성경의 말씀을 믿어야할 것입니다. 바로 모든 민족 가운데 복음이 증거되어야 끝이 오리라(마24:14)는 성경 상에 미래와 비전은 하나님의 단 한 가지 미래에 대한 전망이며 소망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제자들이라면 모든 민족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위해 온전한 믿음과 행전을 다할 것입니다.

자유 경쟁적 탐욕의 축적, 미국 발 경제 위기와 지성, 권력

미국 발 경제 위기의 원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유와 탐욕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은 국가 형성 자체가 개척정신을 근간으로 합니다. 무정부 상태로 서구문명이 이식된 아메리카에서 질서 있는 국가 기반을 형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식민지적 약탈의 야만성과 목숨을 건 영역 확보의 경쟁, 상처받은 인디언들의 피의 보복은 미국인들의 자기 영역 확보에 대한 강박적 집착을 낳았습니다. 자기 영역을 확보한 자만이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며 자기영역을 소유한 자는 곧 자유를 소유한 것으로 인식되어졌습니다.
이런 전통적 미국적 가치를 잘 아는 부시 정부는 신자유주의적 대외 자유 경쟁을 천명하여 국민들의 자유를 위한 정책적 배려를 시행했습니다. 자기 울타리와 영역이 없는 국민들을 위해 주택을 마련해주어 그들의 자유를 보장해줄 수 있는 정부 정책적 능력을 보여주려 하였습니다. 국가적 정책에 힘입어 금융권은 국민들에게 팔 ‘주택모기지론’을 개발했습니다. 금융권은 주택 없는 국민들이 평생 노동해도 갚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돈의 규모를 대출했습니다. 물론 은행들은 국민들이 무리하게 갚을 수 없는 돈을 대출 받는지에 대해 신용 조사를 할 책임이 있지만 원금과 이자를 쉽게 회수할 수 있는 주택금융상품을 만들어 주식 투자자들을 모집하고 그들이 투자하는 돈으로 대출 상환을 대신했습니다. 결국 은행은 주식 투자자들과 국민들을 속이거나 잘못된 금융구조를 조작, 방치해 쉽게 돈을 얻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또한 주식 투자자들이 주택금융상품을 통해 더 많은 돈을 모으게 될 것이라는 꿈에 부풀어 갚을 수 없는 주식을 사들여 자유롭게 살려하는 탐욕을 부렸습니다. 즉 투자자들은 ‘주택모기지론’이라는 정당한 노동력이 없는 투기섬 자본 투자를 통해 일확천금을 꿈꾸며 부의 탐욕에 눈멀어 합법적으로 주식을 사들였던 것이었습니다. 한편 주택을 갈망하는 국민들은 너나할 것 없이 자기 주택 구매를 위해 무책임하게 평생 노동해도 갚을 수 없는 돈을 대출 받는 탐욕을 합법적으로 저질렀습니다. 즉 국가, 국민, 금융권, 주식투자자 모두 소유, 자기 영역 확보를 통한 자유를 꿈꾸었지만 도리어 이러한 제재 없는 탐욕적 자유는 국가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가 미국을 엄청난 고통에 직면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단순히 미국에서만 있었던 탐욕을 통한 고통이 세계 경제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목도하면서 우리는 더 이상 세계 경제는 국가적 장벽이 무의미한 ‘단일시스템’화 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소유를 통한 조건적 자유의 추구는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리스의 헬라적 자유주의는 소유를 근간으로 한 것인데, 당시 그리스인들 중 자유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은 끌려온 노예, 여자, 아이, 노인 등 소유가 없는 자들은 제외되고 소유를 가진 전체 구성원의 10%미만의 사람들만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권리를 가지 자유인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부의 축적과 기득권적 자유를 위해 사회를 지적 시스템화 합니다. 이른바 여유로운 시민 자유 계층으로부터 시작된 그리스 철학은 인간적인 신에 대한 철학적 사고로부터 출발하여 사회 구조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기 시작합니다.
예컨대 그리스 로마 주신인 바카스 신에 대한 철학적 사고로 당위성을 주장하며 기득권층인 경제적 여유가 있는 자유 시민들은 자신들의 축적을 통한 여유로운 생활을 당연시하며 사치하고 향락하며 축제를 벌였습니다. 대다수의 90%이상의 사람들은 축제에 참여하지 못하면서도 바카스 신에 대한 신화적 사고 앞에 불평과 불만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지식을 소유할 수 없었고, 신의 명령 앞에 부자유한 자기 논박과 불평을 하기란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세계의 경제적 번영을 호언하던 신자유주의 지성 엘리트와 권력자들은 미국발 경제 위기에 대처 능력을 상실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미국이라는 세계 초일류 강대국이 하루아침에 세계적 파산 상태를 몰아가는 주체가 될 줄은 꿈에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세계 10위권의 강대국들의 대통령을 비롯한 국가 수반, 경제 장관 등이 일시에 모여 세계 경제 권력을 쏟아 부어 세계 경제를 겨우 심폐 소생할 수 있었을 뿐이고, 세계의 학자들은 현 상황 앞에 자신들의 지적 예측의 무능을 감추느라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식의 상황 진단을 내놓을 뿐입니다.
예측과 통제 능력을 과신했던 세계의 지성과 권력군들은 세계의 붕괴 앞에 겸손해져야 마땅하지만, 그들이 조작한 세계화에 따른 범지구적 탐욕은 지식적 예측도, 거대 어떤 권력도 더 이상 컨트롤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계17,18)은 세계가 거대한 바벨론 체계의 물질문명인 단일 시스템으로 등장하면서 각종 상품으로 번성하다가 일시에 붕괴되는 아이러니를 말하고 있습니다. 경쟁적이고 탐욕적인 세계 단일 경제 시스템은 종말을 향한 강력한 전조임을 믿음의 그리스도들은 깨달아야 합니다. 깨어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세계의 어두움앞에 두려움으로 반응하기보다 먼저 승리의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어야 하리라는 소망을 붙들며 행전하며 나갈 것입니다.

종교적, 영적, 문화적, 물질적 통합 코드의 포스트 모던적 시공간 압축1

놀랍게도 이슬람 문명이 다만 7세기 무렵의 동시대성의 몇몇 공간의 문명의 자양분을 변주 통합해서 강력한 신을 융합했다면 포스트 모던 시대의 통합은 시공간을 뛰어 넘어 타락한 아담이 창조해낸 모든 문명과 시대성을 통합해내려 한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습니다. 물론 포스트 모던의 시대가 하나의 신의 이름으로 모든 문명의 신들을 통합하고 인류의 존재 의미를 통합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근대 이후 퇴출시킨 실증적이고 보편 합리적이지 못한 고대 코드의 신들만을 융합하기에는 포스트 모던적 통합은 더욱 경계가 광범위하기 때문입니다. 포스트 모던의 시대적 조류는 인류의 고대 고안물인 다양한 신격체와 접합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철학과 하이퍼 테크놀로지, 생명 복제와 같은 위험한 생명 공학 등 모든 범위의 아담의 유산들을 시공간을 넘어 검증하고 의미가 될 수 있다면 새로운 질서를 가지고 짜집고 새로운 질서로 융합해 냅니다.
예컨대 종교문명과 물질문명이 공존하는 일본은 천황숭배와 각종 신도 문화를 비롯한 범신론적 신관을 가져 집집마다 고대코드의 신상과 우상들을 섬기지만 미니멀리즘의 초현대코드의 집적기술을 기반으로 전기전자 분야 등에 테크놀로지 산업을 세계적으로 선도하기도 했습니다. 여러 시대의 두 가지 이상의 시간이 한 공간에 공존하는 듯한 이러한 포스트 모던적 현상은 인류에게 신종의 확장적 사고 패턴과 행동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예컨대 일본의 거리에서 코스프레를 한 10대의 청소년들이 중세 유럽 코드의 마녀 분장을 한 채 초현대식의 카메라폰으로 사진을 찍어 모바일 인터넷을 통해 즉시 세계 포털 싸이트에 전송한 정보를, 러시아인이나 인도인, 아이슬란드인 등조차 내 집 안방에서 쉽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과거 지역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문명들의 시대적 정신성들이 인터넷 등 지식 축적의 발달로 부활하여, 현대 인류사회에 동시대적 의미로서 다가갈 수 있는 시공간의 압축적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이상의 문명적 공간에서 오랜 시간 창출된 문화적 의미들은 사람들에게 강력한 정신적 지배요소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교적 문명 속에 고대 코드의 근동 인류들은 거짓 신들의 제시한 종교적 문화적 영적 의미들에 세뇌되어 유일신 하나남의 복음에 대해 거부하였고, 근대 코드의 서구 인류들은 주로 이성과 과학 테크놀로지의 아성 때문에 주님의 복음을 버렸다면 포스트 모던의 현대 신종 인류들은 이 모든 시대적의미들을 부활시켜 영적, 정신적, 물질적인 총체적이고도 통합적 아성을 통해 하나님의 복음을 절대적으로 받아드려 아담의 타락한 의미들을 포맷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칼럼 내용은 책으로 출판될 예정이며 저자의 허락없는 도용 및 복제는 불허합니다*

   ▲ 이스마엘(단행본으로 발행될 소설의 예고 축약본입니다.) 조다윗 선교사  
   ▼ 포스트모던시대와 통합적 매개 문명 이슬람Ⅰ 조다윗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