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조다윗 선교사
작성일 2012-07-19 00: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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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선교 팀사역 빌딩의 초기 접근 방법론Ⅱ

권위구조의 구축

2. 팀 안정화의 키메이커 - 서브리더십

많은 이들이 팀의 초기 정착시 개척 교두보를 놓을 수 있는 영적 환경의 키는 카리스마 있는 리더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 사람 이상 모이는 팀(과거 죄인이었으나 예수님을 믿는 그룹)의 초기 안정화는 종종 리더와 팀원, 현지인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 서브리더를 통해 형성된다.
일련의 미리암과 아론, 고라당의 반역은 서브리더의 역할과 팀 안정화에 대한 통찰력 있는 관점을 제공한다. 이 사건이 있기 직전 모세를 중심으로 한 권위 구조의 출애굽 팀 사역이 깨어지는 일이 있었다. 동역자 미리암과 아론으로부터 모세의 신변에 대한 불편부당함이 제기 되었다. 서로가 가족이기도 한 그들은 모세가 했던 이방 여인과의 결혼을 문제 삼았다. 미리암이 자신의 시누이에 대해 약점을 잡고 공격한 것은 가족으로서 화평도 저버린 일이었다. 과연 미리암은 대의를 위해 그랬을까? 아니다.
모세의 에디오피아 아내는 아무래도 십보라를 언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디오피아란 당시 이집트 주변의 피부가 검은 이방여인을 통칭하는 비어인데 미리암이 문제시 삼는 여인 즉, 십보라를 제외한 또 다른 이방 여인과 모세가 결혼한 정황이 성경에 명백하지 않다. 미리암이 십보라를 문제시 삼는 것이라면 그것은 표면적 명분 투쟁일 뿐이다. 모세가 십보라와 결혼한 것은 출애굽 전의 일이었고 그것이 이스라엘 지도력을 갖기에 문제시 되는 내용이었다면 출애굽 전에 제기했어야 옳다.
출애굽 당시 허다한 잡족이 이스라엘과 동참하여 구원받은 것이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모세의 아내 십보라는 할례 받는 일(이집트 세계에서는 히브리인이라는 표식 곧 히브리인은 노예라는 등식임)을 아들들에게 허용하고 이스라엘의 공동체에 참예했다. 이것은 당시 절대 제국이었던 이집트로부터 히브리인이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구원받는다는 믿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행전이다. 아들을 노예 삼고자 할례를 주는 어미가 어디 있던가! 이미 십보라를 통해 모세가 가정을 이룬 것을 하나님은 열납하셨다. 십보라의 아들들과 심지어 십보라의 아비 이드로를 이스라엘에서 사용하신 것이 그 명백한 증거이다.
실제로 미리암은 모세의 신변을 염려해서라기보다 사건 직전에 세워진 장로들을 통한 대언이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미리암의 반역이 있기 직전 모세는 장로들에게 대언할 수 있는 능력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대언이 계속되는 일들을 독려하고 허용했다. 모세를 제외하고 이스라엘에 현존하는 직임의 대언자로서 독보적이었던 미리암은 일종에 독점적이었던 자신의 지위가 위협받는 것으로 느꼈을 것이다. 미리암이 모세를 공박할 때 '그에게만 주님이 말씀하시냐'며 모세의 대언적 직임을 공격했고 이는 곧 자신의 대언 직임에 대한 우월성의 입증을 위한 접근이라는 점에서 미리암이 대언적 기능에 집착한 것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아론은 적극적 동조자였다기 보다 소극적 방조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미리암이 혈과 육으로는 누이요, 모세도 혈과 육으로는 동생이라는 기로에 서서 단호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하나님 편에 서는 일에 실패했다. 아론이 중간에서 하나님 편에 서서 미리암의 육체적 쟁투를 견제하거나 반대하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면 미리암은 혼자서 감히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권위를 드러냈던 모세와 다툴 마음을 먹지 못했을 것이다. 충분히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아론의 방관과 동조로 이스라엘은 혈육의 정도 무색하게, 성령으로 동역자로서의 인도함을 받던 세월이 헛되어 콩가루가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성경에 바로 연속적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된 고라당의 반역은 흥미롭다. 이 사건은 본질적으로 모세의 권위에 대한 직접적 도전이 아니라 아론의 신변에 대한 질시로 비롯된 제사장 직임에 대한 요구였다. 조금 전에 일종의 서브리더였던 아론은 팀 리더 모세에게 도전이 일어나는 것을 방조했는데 아론 자신에게 유사한 패턴의 도전이 오고 있는 것이다. 놀랍게도 모세와 아론, 미리암이 가까운 혈연 관계였던 것처럼 고라도 아론과 남이 아닌 가까운 친족 관계였다. 가까운 관계인만큼 고라 집안은 아론만이 제사장 직임이 있고 자신들은 레위인이면서 섬기는 직분만이 있는 것이 불편부당해보였던 듯하다. 그들은 모세가 미리암과 아론의 두 동역자에게 도전 받은 것보다 더욱 확실한 방법을 썼다. 레위인으로 섬기는 여러 무리, 장로 등을 대동한 채 여러 입술을 들어 아론으로 세워진 제사장 직임을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육체의 연약한 귀는 진리의 두 세 증인을 통해 하나님 편에 서는 법을 배우기도 하지만 반면에 육체의 요구가 여러 입술을 통해 증거될 때 죄성에 쉽게 동조화한다. 두 명의 서브리더였던 미리암과 아론이 죄성에 동조화하여 권위를 무너뜨릴 때 이스라엘 팀은 위기를 경험했다. 고라당이라는 또 다른 섬김의 사역자들이 죄성으로 또 다른 권위를 무너뜨리고자 했고 이스라엘은 성령의 뜻과 다투는 육체 가운데 동조화 되어 하루에 수만 명이 죽어갔다.

이와 같은 성경적 모델링을 보면 모세를 둘러싼 서브리더들이 하나님의 권위 흐름을 알고 순종하여 화평케 할 때 이스라엘은 영적 안정을 가지고 사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브리더나 사역자들이 권위 흐름을 붕괴시키고 소통을 육체로써 혼란케 할 때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불안케 되었다. 리더가 팀을 이끌어 카리스마와 팀 성향을 결정한다면, 서브리더의 건강한 자질은 개척 초기 팀 안정화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다.


3. 서브리더의 건강한 자질 - 권위와 의사소통의 건강한 방향성과 흐름을 만드는 자, 화해자, 중재자, 조력자

역사적 시대성은 주도 권력의 변화에 따라 나타났다. 고대는 종교 권력의 시대였다. 중세 이후에는 종교 권력에 대한 인류 공동체의 누적된 불신을 틈타 정치 권력이 사회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중세 이후 카노사의 굴욕을 통한 종교 권력의 대정치 권력을 향한 굴복은 시대가 바뀌는 신호탄이었다. 정치권력이 종교 권력보다 우위에 서는 근대가 태동되었다.
경제 권력은 이들 권력 관계에 시녀 역할로서 편승했다. 경제 권력이 노골화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사회적 명분이 약했다. 경제 권력은 물질적 축적에 관계한 것인데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처럼 사회적 대의에 기여하는 공적 명분을 찾기 어려웠다. 경제 권력은 공공적 명분을 가장한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에 배를 불리우면서 독자적으로가 아니라 기생하는 채로 살아남았다. 따라서 경제 권력은 기생적이었지만 또한 제한적 권력의 속성을 지녀왔다. 항상 종교, 정치권력에 컨트롤을 받아왔던 것이다.
고대 사회를 생각해보라. 채집과 수렵 경제로 부족 공동체가 노루를 사냥했다고 가정하자. 어떤 자들은 몰이를 하고 어떤 자들은 사냥을 했다. 따라서 부족원 수대로 노루를 조각내어 나누었다. 그들의 노력 여하에 따른 보상은 현격한 차등을 지니기 어렵다. 인간 능력이라는 것이 별반 많은 차이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부족 구성원이 축적에 대한 탐심으로 노루 열두 조각 중 열 조각을 갖고자 했다고 하자. 부족 사회는 곧 갈등에 빠지고 이러한 요구가 지속된다면 사회적 저항은 겉잡을 수없이 커졌을 것이다. 이와 같이 경제 권력은 축적으로서 타인보다 차등적 우위에 서고자 하는 이기적 욕구라는 점 때문에 사회적 저항을 받아 독자적으로 성공을 거두기 어려웠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경제 권력 의지는 노골화되기보다 종교 권력과 정치 권력이 사회적 명분을 주창하는 사이에서 기생해 활동해왔다. 
역사적으로 경제 권력의 주도적 부상의 시초는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한 상공 계층의 정치 세력화로부터 비롯되었다. 경제적 부를 기반으로 왕과 귀족으로 이루어진 정치 세력의 권좌를 떠받던 상공계층은 정치적 자유를 위해 시민계층이라는 대다수 경제적 빈곤 계층까지 아우르는 개념 속에 자신들을 숨기고 권좌를 끌어내리는 대중 선동을 시작했다. 당시에 주도적 정치 계층에 환멸을 느끼던 대부분의 하층민들은 시민의 자유라는 장밋빛 구호 속에 환상을 품고 시민 혁명의 주도적 힘과 역동성을 부여해서 상공 계층의 정치적 입성을 도왔다. 그러나 경제 계층의 정치 권력 장악은 일반 서민들의 자유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흘러 간 것은 결코 아니었다. 상공 계층의 주도로 이루어진 산업화는 대부분의 일반 서민들의 삶을 자유롭게 하기 보다는 희생시켜갔다. 10살 이하의 아이들조차 열악한 공장에서 하루 20시간 가까운 노동으로 희생되었고, 당시 일반 서민들은 고된 경제적 노동 착취를 견디지 못하고 대부분 평균 연령 30세에 생을 마감했다.
상공 계층은 보편적 시민의 자유를 명분으로 왕, 귀족 등 기존 정치 세력을 몰아내지만 정치권력 장악을 기반으로 경제 권력을 더욱 독점했다. 왕정과 귀족정이 타도된 마당에 급부상한 부르주아 계층에 대한 견제 권력은 서유럽 내에서 한동안 존재하지 않는 듯 했다.
이러한 세력을 견제하고자 일어난 흐름이 사회주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세력의 시작이 자본의 권력화를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현실 인식에서 출발했는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한계 또한 분명했다. 혁명 이데올로기로서 노동자들의 울분과 분노를 자양분으로 한 만큼 폭력적인 방향으로 세계를 몰고 갈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결국 사회주의는 전 세계를 전쟁과 갈등으로 몰아간 후 권력 매개화라는 자기모순으로 붕괴했다.
사회주의의 실패로 인한 자본주의 진영의 일방적 승리는 교만을 불러왔다. 자본주의에 대한 과도한 확신으로 추진된 세계화는 국가 간 시장의 장벽을 허물고 세계를 단일 시장화해 규모의 한계나 공간의 제한 없이 자본에게 전폭적 자유를 부여했다. 따라서 현재는 거대 규모의 탐욕적 자본이 세계에 다소 해악이 되더라도 제어 장치와 안전장치 없이 무법천지처럼 전 세계 어느 곳이든 누빌 수 있게 되었다. 오늘 날에 경제 권력은 지역에 국한된 국가 권력에게 제어되지 않은 채 탈지역적, 범세계적 권력으로 부상하여 인류 역사상 그 어느 시기보다도 힘이 극대점에 이르렀다. 
이제 우리는 인류 주도 권력의 변화라는 시대와 역사의 전환점을 목도하고 있다. 고대와 중세 사이는 종교권력이 주도한 시대적 범주로 본다면 근대와 현대 사이는 정치 권력이, 현대와 미래 사이는 경제 권력이 인류 사회의 주도권을 갖게 되는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이다.


4. 팀 사역의 성경적 모델링 - 성부, 성자, 성령의 협력

성부 하나님이 뜻에 대한 온전한 주권을 행사하셨다. 성자 하나님은 겸손히 성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고 성령 하나님은 보혜사와 돕는 자, 하늘과 땅을 잇는 화해자로서 역사하셨다.
팀 사역에 권위 구조에서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동역과 같은 사역을 모델링으로 삼을 수 있다.
팀 리더는 성부 하나님의 사역처럼 팀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주님의 뜻으로 팀 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을 책임지기 위해 노력한다.
서브리더들은 팀 리더와 팀원 현지인 간에 돕는 자로서 화평케 하며 권위를 통한 말씀과 성령의 흐름에 따라 세워진 리더의 팀 결정을 공증하고 확증함으로 팀원과 현지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앞서 말했듯이 화해자로 서브리더의 자질은 팀 안정화의 결정적 성패가 된다.
팀원들은 성자 하나님의 사역을 좇아 결정된 팀 사역을 행전과 순종으로 현장에서 이루어 간다. 그들은 잠재적으로 행전과 순종을 통해 리더의 자질을 배워나가며 이후 서브리더나 리더로서 또 다른 팀을 이끌고 개척을 나갈 수 있게 된다.


의사결정 구조와 방법론

1. 의사결정에 있어서의 소통 주체 - 팀

성경을 보면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벙어리가 말문을 여는 역사를 자주 찾을 수 있다. 대적은 유난스럽게 아담으로부터 말을 알아듣고 말할 권세를 빼앗으려는 데 관심이 있는 듯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받아 알아들을 수 있는 통로인 귀와 입을 원천봉쇄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팀 사역에 있어 말씀에 따라 사역 기조를 결정하는 데 건강한 의사결정에 대한 합의와 결정이 없다면, 그것은 마치 사람이 벙어리가 되거나 귀먹는 역사와 비슷해진다. 사역 기조는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결정되어야 한다. 사역 초기에 건강한 팀이 되기 위해선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롯된 사역 기조를 바탕으로 건강한 의사결정 구조를 서로 공유해야만 한 몸으로 현장을 경영할 수 있다. 
문제는 사람이 뜻을 정할 때 말씀과 성령의 뜻을 좇아 결정할 수도 있고 선악의 옳은 대로 인간의 혼의 영역인 지정의와 양심을 통해 뜻을 결정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인간의 지정의와 양심이 부차적인 기준일 수 있겠지만 그것으로는 하나님의 복음을 대신해서 민족을 구원시킬 수 없다. 현장을 경영하다 보면 말씀과 성령을 통한 주님의 뜻이 아담의 지정의보다 전적으로 옳고 생명력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의도적으로 배역한 자가 아닌 이상 누구도 자신이 좇는 뜻이 말씀과 성령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지정의에 따른 양심의 결정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는 데 있다.
그리스도의 몸은 이러한 주님의 뜻을 인간의 뜻과 분별하고 구분시키는 데 유익을 준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모두가 만인 제사장임을 감안한다면 주님은 몸의 독점적 부분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보이지 않는다. 묵상과 기도 가운데 서로에게 임한 말씀과 성령의 뜻을 비교해보면 반드시 일치되는 성령과 말씀의 뜻이 드러난다. 한 개인이 몸에 임하시는 성령과 말씀을 통해 주님의 뜻에 배치되는 주관적인 영역에 대해 그분의 뜻을 들을 수 있다면 주님은 종종 그에게 말씀하시고 깨우치실 수 있다. 따라서 의사결정에 있어 많은 통로, 특히 선교사인 모든 팀원들에게 주님의 뜻을 말씀과 성령과의 교제를 통해 듣고 구하게 하면 할수록 팀에 유익이 된다. 주님이 만인 제사장으로 모든 사람이 주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가운데 팀을 그분의 뜻대로 이끄실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팀의 방향성을 주님께 구하고 받은 대로 제시할 수 있는 셈이다. 이것은 여러 사람을 통해 더 원활히 하나님의 뜻이 드러날 수 있다는 점에서 팀에 유익이다.


2. 의사소통의 최종 결정의 권한 - 팀 리더

그러나 팀원 각자가 듣고 구한 하나님의 뜻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여러 측면과 다양한 각도만 보여준다면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 따라서 의사결정에 있어 최종 리더의 권위는 종합하고 최종 결정의 결정권을 지녀야 한다. 그분의 뜻을 찾아내는 데 더 동기화된, 말씀과 성령에 훈련된 사람이 팀 리더가 됨이 바람직하며 그가 몸의 최종 의사결정에 마지막 보루가 되어 결정을 분별하고 확정 짓는 것은 지속적인 경로와 합의를 만든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팀의 최종 리더는 팀을 이끌 중요한 결정이 말씀과 성령의 뜻에 따르는 것인지 최종적으로 분별하고 결단함으로써 팀의 방향이 주님의 뜻과 동행하여 생명의 역사를 지닐 수 있게 한다. 분별이 어려운 지점이나 구성원 간에 첨예한 뜻의 대립이 예상되는데 그리스도의 몸에게 나타내시는 주님의 뜻을 비교하고 팀 리더에게 분별을 요할 수 있다.
문제는 주님의 뜻이 팀 현장의 공동 양육을 통한 복합성에 따른 상황 분별을 통해 시공간의 제한이 있는 리더 혼자의 관찰과 분별로만 결정될 수 있는 경우가 드물다는 데 있다. 물론 개척 초기 현지인과 선교사의 관계는 말씀과 성령의 뜻을 가르치고 가르침 받는 과정이 주효하다. 따라서 합의보다는 수용력이 유효한 생명력이 되는 시기이다. 어린아이 때와 마찬가지로 현지인 교회가 아직 어린 개척 초기 대부분의 주님의 뜻을 개척 사역자 그룹이 찾아 결정 내리도록 이끌어 주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그러나 사역팀 간의 의사결정은 양상이 다르다. 이미 말씀과 성령의 뜻에 훈련된 선교사 간의 의사결정이라면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통해 주님의 뜻이 드러나고 논의될 가능성이 짙다. 말씀과 성령의 권위를 존중하는 팀 내에 다양한 선교사들이 같은 문제에 대해 여러 측면에 따라 말씀과 성령의 분별이 주어질 수 있다.
예컨대 양육된 지 10년이 지난 현지 제자가 있다고 하자. 그는 경제적으로는 궁핍하고 염려도 있지만 회심하고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의욕이 있다. 이 현지 제자를 현장 경영의 원리에서 현지 교회의 잠재적 리더십으로 세울 것인가, 아니면 경제적 측면의 염려가 이 사람의 내면 일부를 붙잡고 있는데 전임 사역자로 지금 세우는 것이 옳은 일인가에 대한 현장 의견이 나뉠 수 있다. 예컨대 두 의견의 측면이 현지 성육신에 따른 리더십 이양에 따른 관점, 제자도에 따른 양육의 관점에 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이고, 성경적 관점에서 틀리지만은 않으며, 성령의 적용점이 어느 시점에는 다 필요한 이야기이다. 현장팀 의사결정에 있어 모든 사역자가 말씀과 성령의 권위를 존중한다는 전제가 동의되고서라도 이런 의견에 측면과 각도 차이는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과 성령에 따라 일리가 있는 의견이 두 가지 이상 존재한다면, 결정권은 몸의 권위인 최종 팀 리더가 하는 것이 옳다.

미세하게 최종 리더의 결정이 어떤 사역자의 견해와 부분적으로 상충될 수 있지만 최종 리더의 결정이 시행착오를 가져올 수 있는 경우라 해도 그의 종합적인 권위를 손상시키는 것은 팀에 종합적 의사결정에 대한 신뢰를 붕괴시킬 수 있다. 만약 리더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뜻을 읽어내지 못하고 고의적 독단과 폐단으로 결정한다면 두세 증인의 공증을 통해 하나님과 몸 앞에서 상위 권위자를 통해 근본적 조정을 받을 일이다.
또한 리더십은 종종 팀 내 사역자의 말씀과 성령에 대한 현장 해석이 다르다고 해서 팀과 권위를 거스르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말씀과 성령은 독점적으로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인 제사장의 원리로 모든 사람에게 부어질 수 있기 때문에 리더는 상충되는 현장 이견을 통해 확고한 말씀에 기준과 섬세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찾아낼 문제이다. 결코 자신만이 말씀과 성령에 따라 현장 경영이 가능하다는 독단에 빠져서는 안된다.


3. 권위와 의사소통의 상호 보완적 관계 설정 - 협력하여 선을 이루라

팀이 의사결정 하는 데 있어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는 경우가 있다. 실패를 받아들일 수 없으면 팀 빌딩은 도전하기 어려운 과제이다. 따라서 팀은 실패를 줄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패를 인정하고 용납하는 성숙과 도전 정신이 무엇보다 생명력에 있어 중요하다.
어릴 때 과실수의 씨를 심어 나무가 된 적이 있다. 모든 주변 어른들이 나지 않으리라 기대를 말라고 했는데 한 해, 두 해 지나도 소식이 없어 죽은 줄 알았던 씨앗들이 3년 만에 싹을 세 개나 틔웠다. 비바람에 한 포기가 꺽였다. 자라지 못할 거라 짐작했다. 그런데 꺾인 가지가 휜 채로 붙어 자랐다. 5년이 지나자 처음으로 꽃을 틔우고 열매를 맺었는데, 강풍에 다 떨어져 나갔다. 이태 째에도 강풍은 견디었으나 실하지 못해 먹을 수 없는 열매만 내다가 결국 겨울이 왔다. 3년이 되자 틀려먹은 나무라고 베어 버리자고 했지만 그해 가을, 보란 듯이 열매를 실하게 맺었다. 열매는 매우 달았다. 
팀 빌딩에 있어 불안정성과 실패 요소는 위 예화의 경험에 따라 교훈을 얻을 일이다. 고의적인 패역함이 아니라면 틀렸다고 말하기보다 성숙해 가는 과정으로 여겨야 한다. 생명력은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어떤 사역이든 7년 정도의 주기도 없이 쉽게 결론 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장구한 역사를 제한하게 한다. 하물며 팀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해석이랴. 사역자라 할지라도 팀원들은 육체성이 있는 연약한 존재이다. 마땅히 말씀과 성령에 대한 절대 순종을 통해 다스려야 할 일이지만 한두 번 의사결정과 팀 방향에 실수가 있었다고 해서 사역자적 신뢰를 철회하는 말을 쉽게 해서는 신뢰가 붕괴된다. 모세가 이스라엘이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을 순간 망각하고 그들의 육체성에 시달린 나머지 얼이 빠져서 바위를 쳤던 사건으로 그는 비전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음을 상기하라.

팀 리더와 팀 서브리더, 팀원, 현지 인간 역학 관계에서 시행착오와 실수로 비롯된 결정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성령과 말씀에 합당한 뜻으로 재조정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친 팀원 권위 구조 간에 신뢰를 붕괴시켜서는 절대 안된다. 왜냐하면 주님의 역사는 신뢰와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종국적으로는 협력하여 선을 이루실 주님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하지만 그분의 몸, 즉 현장팀을 통해 나타나는 그분의 역사를 신뢰치 못하도록 대적은 통로에 대한 불신을 조장한다. 아무리 탁월한 팀도 팀 리더와 서브리더, 팀원에 대한 불신의 말이 돌면 신뢰는 금이 가고 이러한 말들이 지속적 영향력을 가지면 팀 사역은 왜곡되어 종국에는 파탄이 난다. 말씀과 성령을 나타낼 수 있는 팀이 권위를 가질 수 있지만 시행착오 때문에 권위의 통로가 될 팀 권위 구조를 불신하게 함으로써 해체하는 흐름도 건강한 생명력에 기초가 될 수 없다. 


관계적 복음의 팀 정립

1. 구성원 간 관계적 복음의 내면화

팀을 구조화하기 전에 팀 구성원이 개별적으로 어떤 기초와 수행 능력을 지녔는가는 후기 팀 빌딩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동하기 때문에 개별 구성원의 영적 역량이 자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팀 훈련 이전에 선행되어져야 할 과제이다. 이번 논의 대상은 초기 팀 빌딩에 관한 것이므로 개인 선교사 훈련에 관한 중요성을 간과하는 것이 아니라 차제에 논의 대상으로 삼을 기회가 있길 바란다. 다만 팀 빌딩 기초에 있어 불가분 관계에 있는 개별 구성원의 영적 기초 자질이 있는데 그것은 내면적, 관계적 복음에 대한 체질화의 여부이다.
팀에는 항상 갈등이 상존한다. 다만 훈련된 팀은 복음의 실존적 양상인 용서와 사랑을 더 배우는 계기로 갈등을 조정하고 조율하며 성숙해 간다. 그러나 복음적 기초가 훈련되지 않은 팀들은 현지에 성숙한 복음을 뿌리내리게 하기는커녕 팀 내의 관계적 죄성과 연약함도 제어하지 못하거나, 팀원을 용납하지 못한 채 갈등의 골이 깊어져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기 어려워진다. 팀 사역은 사역자 간 권위 구조로 라이프 생활이 결부된다는 점에서 관계적 복음을 통한 갈등 조정 능력이 요구된다. 만약 이를 배우지 못한다면 팀은 초기 빌딩 이후 더 흥왕한 복음의 역사를 얻는 것이 아니라 내부 치리조차 어려워져 상당 부분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
이미 검증된 사역자라 할지라도 관계적 복음의 실제에 있어 매우 미숙하다는 점을 종종 발견한다. 기존 목회 구조는 1인 중심의 독자적 권위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역 토양이 보편적이기 때문에 팀 사역의 수평적 관계 질서 가운데 관계적 조율을 통해 사역을 배우기보다 대부분 권위로 끌어주고 당위시키면 되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2. 관계적 복음에 대한 오해

사람들 안에는 관계적 복음을 말씀을 통해 이해하는 채널보다 양심을 통해 이해하는 채널이 매우 강하다. 여러 팀들을 훈련하다 보면 관계적 복음에 대해 매우 보편적인 오해들이 발견된다.

첫째로, 사람들은 종종 관계적 복음이 쌍방 간의 합의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여긴다. 그것은 복음에 대한 완벽한 착각이다. 관계적 손상이 왔을 때 쌍방 간에 용납하고 용서하면은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사람들에 관계에 있어 일방적인 잘못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지만, 사실 완전한 사람이 없는 고로 아담은 자기중심적이어서 상대방의 잘못을 먼저 헤아리는 경향이 있다. 제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에 눈에 있는 티를 보는 사람들의 경향을 주님은 말씀을 통해 예리하게 짚으셨다. 물리적으로 자기 작은 눈에 어찌 들보를 집어넣겠는가. 아마 티끌이 들어간 눈동자에 맺히는 상은 너무 가까워서 마치 들보가 눈을 가리우는 것처럼 망막에 비춰질 수 있음을 염두에 둔 표현이리라. 그러나 또한 제 눈동자에 들어온 티는 너무 가까워서 아예 보기 어려운 역설이 존재한다. 아담 후손에게는 똑같이 원죄라는 티끌이 들어갔다. 결국 타인이나 자신이나 마찬가지인 것이지만 사건 사건에 있어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는 드물다. 간혹 어떤 사람이 복음의 용서와 용납대로 행하고자 다른 사람에게 화해를 청했는데 그 당사자가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말한다면 화해를 청한 사람은 상심이 되지 않겠는가. 따라서 사람들은 상대방이 화해할 마음이 있고 자신도 화해할 마음이 있는 쌍방 교통으로만 용서와 용납의 노력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을 근거로 한 입장에 선다면, 복음적 용납과 용서는 일방적인 마음이라도 성숙이 있는 사람이 먼저 시도해야 한다. 주님은 죄가 없으신 분임에도 인류를 용납하기 위해 일방적인 죄가 있는 인생들에게 다가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회개하거든 일흔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는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누군가의 재판관이 될 자격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조금만 묵상해보면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은 죄인에 대해서 앙심과 응어리를 가지라는 말이 전혀 아님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회개를 청하고 즉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고도 일흔에 일곱 번 같은 죄를 지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회개에 대해  진정성을 느낄 사람이 있겠는가. 따라서 이 말씀에는 커다란 역설이 존재한다. 즉 회개의 열매가 없는 위선적 회개라도 우리는 받아 주어야 한다. 복음적 용서란 일방적으로라도 하는 것이다. 만약 상대방이 관계적 복음에 대한 화해와 용납을 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관계적 복음을 택한 쪽으로 축복이 돌아오기 마련이다. 관계적 복음에 대해 일방적 원수라도 사랑할 수 있는 성숙이 관계적 복음을 택한 사역자에게 형성된다.
사람을 행위를 보고 용서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복음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우리가 서로의 행위의 경중을 따라 용서한다는 것은 행위의 율법에 기인한 것이다. 복음적 용서란 아담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죄 있는 아담을 향한 주님의 일방적 은혜로 된 용납을 받아들일 때만 가능하다. 즉 사람을 보고 용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용납하신 주님을 보고 하는 것이다.   

관계적 복음에 대한 두 번째 오해는 기도 가운데 응답과 사인이 있을 때 주님의 도우심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성령님의 감동하심과 설득하심은 관계적 복음을 선택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매우 필요한 도우심이다. 그러나 깨어진 관계에서 복음은 지금 즉시 의지적 믿음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깨어진 관계와 갈등을 가진 이들은 주님이 예배 가운데 나오기 전에 즉시 화해부터 하라고 한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만나는 예배를 제한한 정도의 시급한 사건이다. 용서를 미루면 미룰수록 감정의 골은 깊어가고 마음은 점점 단절과 분노에 점령당한다. 인생이 연약하기에 노력과 시간으로 용납을 택할 수 없고 복음의 역사를 믿음으로 갈등이 발생한 지금 즉시 서로를 용납하는 믿음의 결단을 연습해야 한다.

세 번째로 관계적 복음을 선택함에 있어 걸림돌을 주는 오해는 서로의 죄를 고하는 문제이다. 서로의 죄를 고하라는 야고보서에 근거에 서로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서로의 죄를 사해야 진정한 관계적 복음이 열매 맺는다. 우리는 인격끼리 갈등하고 실족시킬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용서도 반드시 소통을 통해 인격적으로 풀어야 한다. 그런데 서로의 죄를 고하라는 성경적 진술에 익숙하지 않아서 우리는 복음에 은혜에 근거한 말로 죄를 고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율법에 따라 죄를 따지는 경향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우를 범한다.
행위의 경중과 유무에 따라 상대방의 잘못을 근거로 자신의 잘못된 행위의 원인을 방어적으로 진술하는 태도는 도리어 종종 죄를 고하지 않은 것만 못한 결과를 낳는다. 상대방의 잘못된 행위를 먼저 따질 것이 아니라 그냥 내 잘못을 먼저 고하면 용서는 쉽게 열매 맺는다. 그러나 상대방의 잘못과 내 잘못을 비등하게 올려놓고 이야기하게 되면 서로 방어적으로 되고 자기 죄들을 상대방의 죄와 비추어 나누었을지라도 서로 정죄당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3. 팀 갈등 조정과 치리 능력

관계적 복음을 온전히 사역자들이 성숙함으로 지켜가지 못할 때 팀이 갈등과 불화를 키워간다면 팀은 생명력의 기초 요소에 서지 못한 채 기형적 양상으로 현장을 견디게 된다. 그러나 팀 개개인이 복음에 대한 관계적 끈을 놓쳤다고 해서 팀이 팀원들을 방치하는 것은 정상적이지 않다. 복음적 생명력을 펼쳐야 할 팀이 내부 문제로만 소모되고 있다면 팀 리더를 비롯해 갈등과 불화의 중심에 서 있지 않은 팀원들이 공동체적 조정과 치리 능력을 통해 상황을 역전시켜야 한다. 성경적 원칙에 입각하여 형제가 범죄한 일이 있거든 먼저 그 형제에게 권고하고 듣지 않으면 두세 증인을 세우고 점점 말씀이 회개를 촉구하는 권위를 느끼도록 팀 리더와 서브리더들이 기민하게 협력하여 권면할 필요가 있다. 만약 끝까지 갈등과 불화에 대해 복음적 순종을 택하지 않고 육체적 죄성과 그로 인한 파탄을 주장한다면 회중 앞에서 세워 권면할 필요가 있다. 만약 그래도 듣지 않는다면 당분간 현장 사역을 중단하고 회개의 시간을 가지며 본부와의 권위를 통해 사역자적 자질에 대해 제고할 수 있다.
대체로 훈련된 사역자라면 몇 단계의 권고를 통해 결국 관계적 복음의 용납과 용서, 회개를 통해 자유케 되고, 팀은 갈등을 극복하는 법에 대해 성숙해져 현장에서 더 원활한 인류를 용서하는 소식인 복음의 능력에 대해 권세를 얻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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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팀사역 빌딩의 초기 접근 방법론Ⅰ 조다윗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