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조다윗 선교사
작성일 2012-04-04 03:2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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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선교 팀사역 빌딩의 초기 접근 방법론Ⅰ

선교 팀사역의 성경적 근거

1. 예수님의 선교 팀 사역 기조

예수님이 초림하셨을 때 그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성자 하나님이셨기에 권능과 기적, 새롭고도 큰 가르침, 겸손하고 온유한 성품과 죄의 역사와 타협하지 않는 불굴의 거룩함의 의지 등등을 나타내시며 탁월하고도 흠잡을 데 없는 균형 잡힌 사역적 모델링의 정점을 보이셨다. 그분은 독자적으로 그 누구하고도 비견될 수 없는 자신의 탁월함과 비상함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실 수도 있었겠지만 그분이 처음 하신 사역은 의아하게도 갈릴리의 형편없는 인생들을 찾아가셔서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함께 할 자들을 모으는 일이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예수님의 도전은 무모해 보이는 일이었다. 그분이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들을 말씀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하나님 나라를 상식적 규모 이하로 추락시킬 인생 군상들에게 자신이 건설할 하나님 나라의 일들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시고 실제로 참여시키고자 끌고 다니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참여했던 모든 자신들의 일들을 정지시키고서야 자신을 따를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셨던 주님의 행동과 기저 속에서 비단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다만 알려 주려고만 부른 것이 아니라는 의도를 알 수 있다. 그냥 가르침을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명백히 참여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일이 있다는 투였다. 따라서 예수님의 초림 사역 기저의 일차적 목표는 팀을 모으는 데 있어 보인다.

신약을 잘 고찰해 보면 예수님은 유대와 이방의 경계인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며 제자들을 부르시느라 오늘날의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 신앙 공동체 형태를 잉태하는 관계적 네트워크를 남기는 일에는 별다른 노력을 쏟지 않으시는 듯했다.(유대인들이 바벨론 유수기 이후 디아스포라 상황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회당이 도리어 예수님을 배타, 거부하는 모순에 대한 반작용이라 생각한다면 매우 피상적인 판단이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초기 사역 모티브는 지역마다 수많은 사람들을 느슨하게 묶어 정착된 신앙 공동체를 짓는 일보다 장차 구심력이 될 헌신된 제자군들이 자신과의 밀도 있는 상호작용으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모바일 선교팀을 만드는 것이었다. 즉 예수님이 하늘로 올리우신 후에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처럼 사역할 수 있는 사역팀을 세우시고 그 뒤에 지역마다 그들을 통해 네트워크 될 수 있는 신앙 공동체, 오늘날의 교회를 받아내는 시즌을 그리셨음에 틀림없다. 오순절 이후 예수님의 이러한 접근은 삼천 명, 오천 명에 걸친 대규모 회심 사건이 일어나면서 보다 전략적으로 드러난다. 상상해 보라. 만약 성령의 급격한 감화로 회심한 사람들을 지도할만한 구심력 있는 사역적인 그룹이 없었다면 오순절 성령강림은 휘발성 영적 사건으로 끝났을 것이다.


2. 바울의 선교 팀사역 기조

바울은 한 지역의 교회 개척을 접근하기에 앞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전략을 세울 뿐, 일관된 기조를 가지고 사역한 패턴이 잘 보이지 않는 편이다. 바울은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앞에서 성령의 지혜를 좇아 사역했기에 그 지역에 대한 성육신과 개척 능력에 있어 탁월함을 보였다. 그러나 임의대로 부는 성령의 바람을 좇았던 사역 속에서도 유난히 일관된 사역적 기조를 고찰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울이 교회 개척에 독자적 개척 접근을 한 것이 아니라 항상 팀을 리쿠르트하고 팀을 통해서 미복음화 지역 내 교회 개척을 도전했다는 점이다. 교회 개척을 위해 전혀 개인적, 독자적 접근을 한 것이 아니라 모바일(mobile)하는 훈련된 교회구조를 만들어 협업적 교회 개척에 돌입했다. 즉 교회가 교회를 잉태하는 매우 담대하고 비상한 전략을 일관되게 구사한 것이다.
그의 전략은 생명력 있으며 깊은 영감과 교훈을 준다. 바울의 선교팀은 지속적이고 연속적인 사역이 가능했다. 심지어 바울이 지역의 복음에 대한 저항과 거부 때문에 쫒겨나는 최악의 상황이 왔을 때도 팀 사역자들은 사역을 지속하거나 현지인까지도 계속해서 복음을 증거하며 집단적 개척의 연속성에서 공동체적 구조를 이어가려 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울을 통해 본 신앙의 형태가 고립무원의 개인적 신앙만이 아니라 팀을 통한 공동체적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울의 팀사역은 적대적이고 핍박이 있는 환경 속에서도 불굴의 자생력을 가지고 자라갔다. 그리고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교회의 천국 권세(‘네 고백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는 개인 신앙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 더욱 효과적으로 발휘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또한 바울이 사역한 지역들은 길어야 2-3년, 핍박 때문에 짧게는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3주정도 밖에 가르치지 못하고도 현지의 자생적인 복음 전파의 흐름을 남기는 등 현지의 리더십 배양과 이양에서 탁월한 전이 속도를 보였다. 공동 팀사역은 복음이 바울만을 통해 독점적으로 전파되는 구도가 아니었기에 바울이 핍박 때문에 불가피하게 현장을 일탈할 때도 그의 팀원(디모데, 디도, 누가, 마가, 브리스길라, 아굴라)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가르쳐졌다. 또한 신앙의 전달 형태가 집단적이었기 때문에 현지인들은 신앙을 지키는데 한 사람만이 아니라 공동 책임이 있다는 자세를 금방 배웠다. 바울팀이 떠나고도 종종 현지인 신앙 공동체를 통해 스스로 복음이 전파되어졌다. 오늘날에 현장 개척이 통상 약 20년 정도는 지나야 복음 전파의 자생적 현지 공동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주기와는 완연히 다른 구도의 사역이었던 셈이다.


팀사역적 접근의 역사적 사례

1. 근현대 선교 사역의 유효성, 윌리엄 캐리와 모라비안 교도

월리엄 캐리가 근대 선교의 아버지로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는 데는 선교 역사가들의 이견이 별로 없다. 왜냐하면 윌리엄 캐리가 주장했던 지상명령의 항구불변성에 대한 논증이 유럽 내 기독교 집단의 지상명령에 대한 유럽 중심적인 이해의 틀을 바꿔 놓았고, 이것은 수백 년 동안 유럽 내에 머물렀던 복음의 역사를 다른 대륙으로 확산시키는, 거시적으로 정지되다시피 한 선교의 성경적 근거를 다시 추진력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니는 획기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개인적 자질도 뛰어났다. 영국의 석학들이 패러그래프 하나만 등재해도 자부심을 갖는다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윌리엄 캐리의 글이 여러 분야에서 저변이 되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그는 정규교육을 통해 많은 학문적 전문성을 쌓은 인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인도 선교를 하면서 수많은 언어로 4복음서를 번역했고 성경 대부분을 번역한 경우도 여러 번이었으며, 선교에 유익하다면 생물도감 및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학문적 자료도 남겼다. 가히 천재적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러나 그러한 윌리엄 캐리에게도 딜레마가 있었다. 바로 현장 선교의 열매에 대한 갈증이었다. 윌리엄 캐리는 인도 선교에 있어 매우 헌신적인 자세를 견지했지만 현장 열매는 매우 미미했다. 십여 년이 넘도록 한 명의 제자가 있었을 뿐이고 그나마도 신앙의 확고함이 온전하지 않았다. 윌리엄 캐리는 지속적인 선교에 있어서도 본인이 아닌 다른 문제로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졌다. 아내가 현장 선교를 향한 남편의 헌신을 이해하지 못한 채 정신병적 질환을 겪었고 가정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윌리엄 캐리는 자신의 사역을 반추하면서 돌파를 찾고자 했는데 의외의 사람들로부터 해답이 엿보였다. 바로 모라비안 교도와 조우한 것이었다. 당시 모라비안 교도들은 종교전쟁에서 쫒겨 다니다가 진젠도르프 영지에 정착한 후 전 세계에 퍼져나가 세계 선교를 감당하고 있었다. 교육 수준도 좋지 못했던 그들의 신앙적 면모는 말씀의 체계적인 양육보다 실존적인 성령에 대한 체험에 의존된 신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라비안 교도는 인도 사역에서 지속적인 열매를 맺었다. 현지인이 회심했고 교회가 개척되었다. 후대에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울 정도로 획기적인 인물이었던 윌리엄 캐리로서는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일 수도 있었을테지만 캐리는 자신에게 없는 것과 모라비안 교도에게 있는 것을 통해 사역을 배우고자 했다. 사실 거의 모든 면에 있어서 모라비안 교도 개인들의 자질보다 캐리의 자질이 뛰어나고 균형 잡혀 있었다. 그런데 단 하나, 모라비안 교도는 의도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들도 알지 못한 채 팀사역을 하고 있었다. 모라비안 교도는 집단으로 이주를 하면서 개인 회심의 관점에서 현장 지역을 경영하는 것보다 교회 개척이라는 집단 공동체 사역에 더 공을 들였다. 현장 교회 개척 구도가 빨리 놓였고 그 지역 불신자들이 보다 쉽게 복음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신앙 전달에 있어서도 성령을 통한 거듭남을 강조하여 중생과 개인 구원에 관심을 가졌지만 신앙 유전의 전달은 언제나 공동체적 라이프 스타일로 전달했다. 이로써 모라비안 교도들은 캐리에 비해 월등히 많은 영혼들을 회심시켰고, 공동체를 통해 현지인들이 신앙을 보호받으면서 안정적으로 배울 수 있게 했으며 지역에 복음을 전할 전초기지로서 신앙 공동체를 보다 원활히 개척해냈다.


2. 맥가브란의 집단 개종에 대한 논의

  루이시 부시와 함께 미주의 양대 선교 신학자로 불리우는 맥가브란은 서구의 유의미한 선교적 자취를 추적했다. 그의 결론은 의외였다. 서구 선교에 있어 현지 민족에게 효과적이고 지속력 있는 신앙 유전이 전달된 사례는 대부분 집단 개종의 형태였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강제적 혹은 전체주의적 형태의 신앙 전달 방법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를 잉태하는 공동체적 구도를 놓는 선교 방법론에 의미를 두는 분석이다. 개인의 신앙은 현지 핍박과 고난을 잘 이기지 못하고 소멸되어진다. 그러나 팀을 통해 전달된 공동체적 신앙은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천국 권세가 개인적 신앙이 아닌 교회 집단에게 주어졌다는 말의 유효성을 실감케 한다. 일차적으로 신앙이 아직 어린 현지인은 신앙적 보호가 강화된다. 현지 신앙인에게 배교의 유혹은 상존한다. 중동, 중앙아시아 현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신앙 때문에 자신이 몸담았던 혈연적 부족 공동체, 전체적 종교 공동체, 사회적 집단으로부터 핍박을 받기 때문이다. 때로 사회적 정체성의 소멸은 둘째치고 생명의 위협까지 생기는 상황은 그들 혼자 싸워서 감당할 압력이 아니다. 때문에 곧바로 보호해줄 또 다른 영적 가족, 신앙 공동체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들은 대적의 공격 가운데 쉽게 고사되어버릴 위기에 봉착한다.
철저하게 통계와 사회학적 분석을 통해 결론을 도출한 맥가브란의 견해를 참고해 보면, 선교사를 통해 전달된 복음이 현지에서 자생적이고 지속적인 신앙 집단을 잉태한 사례는 개인 유전의 유효성보다 팀을 통한 공동체적 구조의 집단 신앙의 유효성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교회가 교회를 잉태하는 구조가 현지에 자생적이고 지속적인 개척 흐름을 만든다.


팀빌딩의 실제

팀빌딩은 인격을 통해 형성된다. 따라서 미션에 따른 기능적 역할화나 수단화에 치우칠 수 없다. 많은 서구 사역자들이 팀사역에 대해 부르짖었지만 중동 이슬람 권역에 효과적인 팀사역 모델링이 드문 이유는 팀형성에 대한 관점이 미션 수행이라는 명분 아래 기능적인 역할의 수행과 조합에 치우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신격이시며 말씀과 성령의 인격적 감동을 통해 역사를 이끄신다. 따라서 팀은 하나님과의 인격적ㆍ관계적 하모니인 샬롬을 통해 팀 구성원 간에 인격적ㆍ관계적 하모니에 대한 저변이 마련되어야 한다.
초기 팀 빌딩이 더딜지라도 팀은 관계적 복음의 지속력, 내부 문제 해결 능력의 배양, 건강한 권위구조에 따른 의사결정의 하모니를 통한 형성에 주력해야 한다. 만약 초기 팀빌딩에 있어 현장 교회 개척이라는 미션 성취에 직접적 연관이 없어 보이는 팀 내부 문제라 할지라도 이러한 관계적 기초 형성은 장기적인 하모니를 위해 과감히 주력할 필요가 있다.
관계적 팀형성 요소를 통한 샬롬과 하모니, 자생 능력은 역동적인 사역과 미션 성취를 위한 튼튼한 기초가 된다. 만약 관계적 팀형성에 감도가 없는 팀 위에 섣부르게 팀 다이나믹과 은사, 현장 미션과 성취 등을 빌딩(building)하면 작은 하중에도 기초 없는 집처럼 쉽게 허물어진다. 이러한 팀은 쉽게 대적의 먹잇감이 되어 다시 빌딩(building)하기 어려울 정도로 선교사들끼리 갈등하고 참소하는 등 내부 소모에 골머리를 썩힌 채, 팀 분열과 선교사 케어 등 산적한 문제를 양상하여 결과적으로 지속적인 현장 개척을 어렵게 한다.(물론 후기 팀빌딩에 있어 현장 미션보다 내부적인 문제에 골몰하는 팀 역학도 정상적인 구도는 아니다.)

그러나 모여서 친밀감이 형성되었다고 팀의 관계적 기초가 마련되었다는 것은 순진한 착각이다. 팀이 게더링(gathering) 된 것과 유기적 구조로 빌딩(building)되어 있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팀빌딩의 유기적 형성의 몇 가지 기초 요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말씀과 성령이 지속적으로 흘러갈 수 있는 통로인 권위 구조에 대해 팀원 간의 건강한 신뢰가 있어야 하고, 둘째, 말씀이 상호 소통되기 위해서 의사 결정(decision making)의 합의된 흐름을 만들 줄 알며, 셋째, 팀원 간의 관계적 복음에 대한 순복과 문제 해결 능력, 조정 기능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권위구조 구축

1. 팀 리더십과 권위

권위와 순종의 흐름이 존재한다는 것은 권위주의와는 엄연히 다르다. 말씀과 성령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방향과 흐름을 만드는 것이 권위이지, 인간적인 입지나 야망에 따라 수직구조를 세우는 것이 권위는 아니다. 자칫 인간적인 방향과 수직적인 서열에 대한 맹종은 진정한 권위가 되어야 할 말씀과 성령의 뜻이 아닌 인간의 뜻과 입지로 위장된 권위주의로 팀을 함몰시킬 수 있다. 따라서 팀 내 최종 리더십은 말씀과 성령의 지속적인 순종을 열어갈 가능성을 가지고 팀을 말씀과 성령 앞에 순복시킬 수 있는 자라야 한다. 그에게는 팀의 현재와 미래의 잠재적 가능성 위에 말씀과 성령의 뜻이 구현되도록 팀의 규모에 맞게 인도할 종합적 지도력을 가질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팀의 리더십이 세워질 때 주의해야 할 점은 권위가 세워지는 것이 사람의 생각처럼 말씀과 성령의 완벽한 통로가 되는 자를 세우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한 리더(leader)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잠재된 모든 순종의 가능성을 펼쳐 보시며 사람을 택하시고 세우시기 때문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권위로 세워지기 위해 그의 실패도 사용되어졌다. 왜냐하면 젊은 날 그의 육체적 열정은 성령에 순종되기 위해 용인된 시행착오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 치명적인 시행착오를 통해 자신의 의지와 노력, 입지로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성령의 뜻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나 40년간 도망자로 광야 생활을 하고 이스라엘의 택한 리더십으로 돌아오게 되는 모세를 맞이하는 아론의 심정을 상상해 보라. 아론은 하나님의 음성으로부터 모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돌아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은 매우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모세의 전력은 아론에게 치명적인 것이었다. 스스로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겠다고 히브리인을 학대하는 이집트인을 살해하고, 두려워 도피했던 무책임한 동생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리더(leader)라니... 아론의 집안이 모세 하나를 위해 얼마나 큰 희생을 하였는지를 기억해 보자. 그들은 바로가 죽이라고 말했던 히브리 남자아이를 금령을 깨고 살려준 가족이었다. 더군다나 모세가 이집트의 왕자가 되었을 때 어머니는 그의 보모 역할을 하며 정체가 들통날까 숨죽이며 살아야 했을 것이다. 모세가 좀 더 나이를 먹자 이집트 공주의 아들, 즉 왕자라는 대우 앞에 모세의 형과 누이, 심지어 어머니까지 모세에게 깍듯이 존칭을 썼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든 기대와 희생을 헌신짝 버리듯 순간의 격정을 참지 못하고 사람을 죽이고 일말에 책임조차 지지 않은 채 도망친 자가 바로 동생 모세였던 것이다.
이러한 모세의 전력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아론은 동생이 다시 이스라엘을 구원한다고 등장하는 것에 달가운 심정이었을까. 매우 마음이 어려웠을 것이다. 아니 차라리 모세가 아닌 다른 누가 이스라엘을 구원한다면 백 번도 순종할 수 있는 일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모세의 형 아론은 이런 인간적인 번민을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광야길로 모세를 영접하기 위해 나아간다. 이것이 먼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작은 가능성을 일으킨 아론의 위대한 순종이었다.
모세의 전력에서 드러나듯이 인생이란 실패와 허울을 가지고 있는 연약한 존재이다. 다만 하나님이 타락한 아담의 실패를 사용하실 때 그것은 더 이상 누룩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선한 역사로 사용되어지는 것이다. 한 팀 안에 민족들의 구원을 위한 리더십을 세울 때 주님은 리더(leader)를 포함한 모든 구성원에게 연약함이 있음을 아신다. 연약함을 인한 실패와 전력을 통해 하나님께 순종될 가능성을 배웠다면 주님은 과감히 사람을 세우신다. 다만 그들을 팀으로 부르실 때에는 그들이 서로 연약함으로 주장되어 신뢰를 깨고 역사를 저버리는 우를 범하라는 것이 아니라 연약함에 대한 자정 능력, 즉 십자가 앞에 부인된 자아를 가지고 서로를 용납함으로써 연약함을 상호 보완해 주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건강한 팀을 위한 주님의 뜻이 담긴 역학관계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수차례 미션팀을 빌딩(building)하면서 리더도 언약한 존재이며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팀 안에 진정한 권위를 세우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점이라는 것을 배웠다. 리더(leader)는 자신이 실패할 수 있고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겸손하게 자신을 주장하지 않고 어떠한 순간에도 주님의 의지하고 경외할 수 있다. 또한 팀  안에서 자신만이 옳다라는 독선과 그것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일방적인 권위주의적 행태를 고집할 수 있는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인간인 리더를 완전함의 기준으로 판단, 위탁하려는 완벽주의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사람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은 언젠가 실족한다.
하나님은 인생의 연약함을 인간의 완벽함으로 보완하지 않으시며 주님에 대한 전적 의존과 순종을 통해 인생을 보완하신다. 따라서 주님은 서로의 연약함을 완전한 주님에 대한 의존과 순종을 통해 서로 용납하고 가리울 것을 요청하신다. 서로의 약점을 통해 현장을 보는 팀은 믿음의 역사를 현장에 전달하는데 미숙한 팀이 된다. 현지인들조차 그들의 사역자들에 대한 평가에 감염되어 사역자들의 약점을 볼뿐, 자신을 위탁하거나 신뢰하지 않는다. 결국 그들을 죄악된 인간으로 볼 뿐 성령과 말씀을 의지하는 사역자로 보지 못하게 하는 누룩을 만들어 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말씀과 성령이 다스리는 팀에서 리더(leader)가 연약함을 주장함으로 인해 책임과 역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대체로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여 열매 맺는 법을 알고 있고, 자신뿐만 아니라 팀에게도 그러한 순종을 확산시킬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자로, 종합적인 영향력을 자연스럽게 발휘할 것이다. 만약 말씀과 성령으로 통치하는 데에 언제까지고 미숙한 채로 리더(leader)가 되길 고집한다면, 팀 전체를 말씀과 성령에 대해 미숙하게 결정하게 하고 방치하게 만들 것이다. 때문에 리더의 자질은 사람의 입지와 조건, 외형이 아니라 전적으로 말씀과 성령에 순종함으로 그 영향력이 검증되어야 한다.

계속


*칼럼 내용은 책으로 출판될 예정이며 저자의 허락없는 도용 및 복제는 불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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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 소요 사태를 통해 본 아랍 이슬람의 조명 조다윗 선교사